나의 이야기

경주김씨 계림군파 2세손 刑曹判書 諱孟誠

慧山 2014. 11. 22. 15:42

刑曹判書諡僖敬公 諱 孟誠之墓 (형조판서 시 희경공 휘맹성 지묘)   父 균

孟誠이요. (시호)僖敬(희경) 조선 초기의 문신관료이다甲寅서기1374年 生하시고 交河盧氏 順興安氏 仁川李氏이다. 己巳서기144982776세로 하니. 묘소는 경기도 인천시 구월동 亥坐辛酉서기1981년 후손들의 원력으로 전북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조항산 先塋移葬   

김맹성(金孟誠, 13741449년 시호는 희경)은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계림군(鷄林君) 김균이다.

개국 3등공신 김균(金稇)1398년 사망했으며, 김맹성(金孟誠), 김중성(金仲誠), 김계성(金季誠) 등 삼형제를 두시었다. 조선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음보(蔭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이나 음덕에 의해 특별한 대우를 받아 관직을 얻거나 벼슬에 보임됨)로 관직에 올라 1408(태종 8)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이 됐다. 그러나 무고 죄인(誣告罪人)의 처형에 풍헌관(風憲官)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헌부의 종3품 집의(執義, 대검찰청 검사장) 탁신(卓愼), 사헌부의 정5품 검사인 지평(持平) 이소축(李小畜)과 함께 파직당해 보주(甫州)에 유배됐다. 1420(세종 2)에 다시 기용돼 검사장급인 집의(執義)가 되고, 1423년 우부대언, 이듬 해 우대언이 됐다. 이어 1425년에는 우대언(右代言) ()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고, 이듬 해 호조참판(參判, 2품 차관) 등을 거쳐, 1427년 종2품 검찰총장인 사헌부의 대사헌(大司憲)이 됐다. 그 해 흉년이 들어 재해가 혹심하자 구황책(救荒策)을 올려, 농사에 피해를 입은 각 고을의 조세를 감면할 것, 각 도에 조관(朝官)을 파견해 농민의 고통을 위로할 것, 풍년이 들 때까지 중앙과 지방의 영선(營繕)을 금할 것, 변방 방어에 특별히 공이 많은 자를 등용할 것 등을 건의했다.1428년 형조참판(參判, 2품법무차관)으로서 분용미(分用米)를 추징하지 않은 책임으로 회인(懷仁)에 유배됐다. 그 후 곧 풀려나 경창부윤(慶昌府尹), 중군(中軍, 조선시대 각 군영에 속한 종2품 서반 무관으로 정원은 1) 동지총제(同知摠制)를 거쳐 1430년 사은부사(謝恩副使, 중국에 감사함을 전하러 가던 사신의 두번째 서열)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이조참판(參判, 2품 차관), 함길도도관찰사(都觀察使, 2품 도지사)를 거쳐, 143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 3)가 되고 그 해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이듬 해 인수부윤(仁壽府尹, 정종 22월에 설치한 동궁의 관아인 세자부의 벼슬)을 거쳐, 1435년에 경기도관찰사(觀察使, 2품 감사)가 됐다그 뒤 1437년에 호조참판(參判, 2품 차관)이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參判, 2품 차관) 등을 거쳐 1439년에는 형조판서(判書, 2품 법무장관)에 올랐다. 이어 호조판서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나라의 명령을 하달하며 궁궐을 호위, 군사 관계의 기무를 맡은 관청인 중추원의 종2품 관직)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단의(端懿, 단아하면서도 의연함)하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다.    (사진 2009329일 리키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