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주김씨 계림군파 4世 司憲府大司 諱 升卿

慧山 2014. 11. 22. 15:41

계림군파 4승경님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慶州金公升卿之墓    父 신민

()升卿(승경)이요 (이름) 賢甫(현보)이다. 조선 성종때 전기 문신으로 庚戌 서기1430出生하시고 癸丑서기149331864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경기도 인천 주안면 구월리에 亥坐合兆. 은 서기1453司馬試(사마시)를 거쳐 式年文科(식년문과)及第(급제)하고 持平(지평) 戶曹正郞(호조정랑)을 지내셨다. 조선 성종때 都承旨.漢城府右尹(도승지·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禮曹參判.大司憲(예조참판·대사헌)에 이르셨다. 나라에는 충성으로 부모님께 효행으로 관료때는 직무 충실과 행정능력 출중으로 으로 부터 금띠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配淑夫人(배숙부인) 密陽朴氏(밀양박씨)()㡒祖潤福(준조강복) 外祖仁川李元絳(외조인천이원강)박강복의 이다, 朴氏婦德 靜淑(부덕정숙)하며 孝誠至極(효성지극)하고 家內友愛極盡矜式(가내우애극진긍식)하셨다, 묘소는 公墓 合兆로 경기 인천 주안면 구월리에서 서기198210월 전북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조항산內 先塋의 각기 다른 장소에 모셨다가 신도비 좌측상단으로 移葬(이장)하고 서기20093월 현재 모습으로 봉분사토와 () () () ()孫子(손자) 顯祖(현조 琠의 子) 順祖(순조 瑞의) 曾孫(증손) (順祖 )를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묘원과 설단을 조성 하였다.   (2014년 4월 6일 리키촬영)

 

子 전  子 영     子 근   子 호

 

 

 

 

 

 

 

 

 

世宗(세종)12年(1430)∼成宗(성종)24年(1493),本貫(본관)은 慶州(경주)字(자)는 賢輔(현보)이고 鷄林君(계림군)金튲(김균)의 曾孫(증손),知中樞院事(지중추원사)金新民(김신민)의 아들이며 朝鮮前期(조선전기)의  文臣(문신)이다. 端宗(단종)1年(1453)司馬試(사마시)를 거쳐 1456年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여 世祖(세조)8年(1462)벼슬이 佐郞(좌랑)에 이르렀다.其後(그후)弘文館校理(교리),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걸쳐 戶曹正郞(호조정랑)을 지냈다.이때 王(왕)이 楮貨(저화)의 利害(이해)을 下問(하문)하자 모두들 이롭다고 進言(진언)했으나 홀로 不利(불리)를 主張(주장)했으며,京畿道(경기도)에 敬差官(경차관)으로 나가 積滯(적체)된 罪人(죄인)處決(처결)에 솜씨를 보였다. 成宗(성종)2年(1471)承文院參校(승문원참교)를 거쳐 宗簿寺正(종부시정)에 올라 慶尙道賑恤敬差官(경상도진휼경차관)을 受任(수임)했다. 成宗(성종)9年에 右承旨(우승지)로 들어와  約(약)2年間(년간)國王(국왕)을 잘 받들어 金帶(금대)를 下賜(하사)받았으며 使臣(사신)을 迎接(영접)하는 宣慰使(선위사)로 여러次例(차례)差出(차출)되었다. 成宗(성종)12年(1481)以後(이후) 兵曹參知(병조참지)·都承旨(도승지)· 戶曹參判(호조참판)· 大司憲(대사헌)等(등)要職(요직)을 歷任(역임)하고 陽城君(양성군)에 封(봉)해졌다.成宗(성종)14年(1483)5月 23日에 漢城府右尹(한성부우윤)에 就任(취임)하였고,이듬해 3月 11日에는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에 除授(제수)되어 漢城府(한성부)의 行政(행정)을 管轄(관할)하였다. 1479年에는 右承旨(우승지)로서 南大門(남대문)의 重修(중수)에 關與(관여)하였고,1485年에도 戶曹參判(호조참판)으로서 市廛(시전)의 移轉問題(이전문제)로 市廛商人(시전상인)과 政府間(정부간)의 問題(문제)가 發生(발생)하자 漢城府(한성부)平市署(평시서)와 議論(의론)하여 市廛(시전)建物(건물)을 옮기도록 하였다.그는 맡은 바 業務(업무)에 充實(충실)하였고, 特(특)히 獄事(옥사)의 處決(처결)에 公正(공정)하였으므로 疑心(의심)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에게맡겨 處決(처결)하였다.燕山君(연산군)10年(1504)甲子士禍(갑자사화)때燕山君(연산군)의 生母(생모)尹妃(윤비)의 廢位(폐위)에 關與(관여)했다는 罪目(죄목)으로 剖棺斬屍(부관참시)의 追刑(추형)을 받았다.

 

 

 

 

 

 

 

 

 

 

 

 

 

()의 이름은 승경(升卿), ()는 현보(賢甫), 본관은 경주(慶州)로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의 후예이다.

증조 제숙공(齊肅公) 김균은 태조 때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고, 벼슬이 숭록대부(崇祿大夫, 1품 품계)로 계림군(鷄林君)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김중성(金仲誠)은 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 (판봉상사사는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해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됐던 관서)를 지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2품 국방장관)에 증직됐다. 아버지 김신민(金新民)은 자헌대부(資憲大夫, 2품 품계)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인데 남양(南陽)의 대성(大姓) 홍수명(洪守命)의 딸을 아내로 맞아 선덕(宣德) 5년 경술(庚戌, 1430년 세종 12)에 공을 낳았다. 김승경(金升卿)의 아버지 김신민(金新民)1426(세종, 8) 병오(丙午)에 식년시(式年試, 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 동진사(同進士, 고려 및 조선 초기 문과 급제자의 등급 중 제술업에 급제한 사람의 등급) 6위로 합격했다. 김승경(金升卿)은 경태(景泰)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 사마시(司馬試, 진사시험)에 입격하고 병자년(丙子年, 1456년 세조 2) 과거에 급제했는데, 급제하기 전에 재명(才名), 벼슬하고 나서 현명(賢名)이 각각 있었다.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정과로 급제해 벼슬이 예조참판(參判, 2품 차관)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종2품 대사헌(大司憲, 검찰총장)에 이르렀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자질과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고, 또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했다. 승정원에 재직할 때 직무에 충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나, 왕에게서 금띠(금대, 金帶)를 내려받기도 했으며, 특히 송사처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 이력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하관(堂下官)으로는, 형조(刑曹), 호조(戶曹)의 낭관(郎官)과 종부시 정(宗簿寺正,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인 종부시의 정3), 봉상시(奉常寺,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해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의 정(, 3),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 백관을 규찰하던 대검찰청의 검사장)를 지냈다. 당상관으로는 병조 참지(兵曹參知, 3품 국방차관보)를 지냈으며, 병조(兵曹, 국방부)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왕명을 출납하던 관아, 왕의 비서기관)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가 되고 여러 번 옮겨서 좌승지(左承旨, 3)에 이르렀다. 2차례 도승지(都承旨, 3품 왕의 비서실장)가 됐는데 왕명의 출납을 합당하게 했고, 세 번 대사헌(大司憲, 2품 검찰총장)이 됐다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2품 도지사)가 됐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호조, 예조(禮曹), 공조(工曹), 형조의 참판(參判, 2품 차관)이 됐는데 다 명성과 실적이 있으므로 선조가 후하게 대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