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주김씨 계림군파 3世 副提學公 諱 新民

慧山 2014. 11. 22. 15:41

계림군파  3世  諱 新民(신민)副提學公(부제학공중성

는 신민(新民) 明之 官(부제학공)副提學公 戊寅 1398 직제학 김신민(金新民) 전옥부승(典獄副承)으로서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諱稛3세손. 1426(세종8) 문과(文科)에 진사과 (進士科) 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제학(提學) 동지중추 (同知中樞)가 되었다. 종학 박사(宗學博士) 김신민(金新民) 등이 상소하기를, “지금 궁성 옆에 절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은 비록 언관(言官)은 아니오나 직책이 사유(師儒)로 있어 감정이 마음에 격동하므로 감히 잠자코 있지 못합니다. 공경하여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내신 성명(聖明)과 날마다 오르시는 공경으로 불씨의 탄망(誕妄)한 것을 명백하게 아시니 어찌 공경하여 믿고 높이 받드는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내원당(內願堂)이 조종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므로 이를 창건하고 새롭게 하여 효도하는 생각을 펴려 하시는 것입니다. 신 등도 또한 전하의 마음이 다른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염려를 일으키는 것은 비록 해되지 않는 것 같아도 후세의 폐단은 말할 수가 없고, 한 불당을 일으키는 것은 비록 경비가 많이 들지 않더라도 궁성 북쪽은 그 장소가 못됩니다. 대궐 뜰은 신료들이 조회하는 곳인데, 불당이 대궐 뜰과 서로 가까와서 조회 받을 때를 당하여 소균(韶鈞)은 앞에서 아뢰고 범패(梵唄)는 뒤에서 들리면 사()와 정()이 서로 섞이니 심히 불가하고, 국가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주려 죽는 사람이 서로 연이어 이루 진휼할 수가 없는데, 어리석고 미혹한 백성들이 이 명령이 있는 것을 들으면 다투어 서로 머리를 깎고 편적(編籍)을 도피하여 노는 사람이 날로 증가되고 군액(軍額)은 날로 감하여질 것이니, 정치에 방해되는 것이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하물며 게으름과 공경은 일정한 법칙이 없고 비태(否泰)4271) 는 서로 덮치는 것이니, 처음에는 비록 미미하나 내종에는 반드시 커지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이루어진 일을 인습하여 조그만 절을 창건하나, 신 등은 깊이 두렵건대 이제로부터 시작하여 사사(寺社)에 대한 말이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하여져서 후세에 반드시 가르켜 구실을 삼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묘소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194-9번지  서기1449 기사 김신민(金新民)을 사간원 우사간 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 태백산사고본

子 승경   子 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