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주김씨 계림군파 파조 1世 翠竹當 諱稛(균)

慧山 2014. 11. 22. 15:42


계림군파 1균님  父 智允

  이요 는 취죽당(翠竹當)이니 1341년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신사(辛巳)에 황해도(黃海道) 안주(安州) 재령(栽零)에서 출생하여 1360년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경자(庚子) 9월 성균시(成均試)에 입격(入格)되다. 1362년 고려 공민왕 임인(壬寅)에 안주(安州)에서 개성부(開城府)로 입경(入京). 1364년 고려 공민왕 갑진(甲辰)에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에 제수(除授). 1370년 고려 공민왕 경술(庚戌)에 삼사판관(三司判官)이됨. 1375년 고려 우왕(禑王) 을묘(乙卯)에 중서문하성좌간의대부(中書門下省左諫議大夫)가됨. 1380년 고려 우왕(禑王) 경신(庚申)에 밀직좌승선(密直左丞宣)이됨. 1386년 고려 우왕(禑王) 병인(丙寅)에 삼사사(三司使)가 됨. 1391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신미(辛未)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됨. 1392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임신(壬申)정월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되다.고려국(高麗國)에 기강(紀綱)이 문란(紊亂)하여 백성들이 유산이우(流散移寓)되고 왕실사직(王室社稷)이 위기처지(危機處地)에 있을 때 1392년 고려 공양왕 임신(壬申) 717일에 개성부(開城府) 수창궁(壽昌宮)에서 배극렴(輩克廉)성산백:정절공(星山伯:貞節公)39인의 중신(重臣)들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推戴)하여 조선국(朝鮮國) 태조왕(太祖王)으로 등위(登位)하는데 찬의(贊議)하여 동년 728일에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영록대부(榮祿大夫) 중추원사(中樞院事)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가됨.1392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임신(壬申) 916일에 조선국정회(朝鮮國廷會)에서 특진(特進)되어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계림군(鷄林君)으로 책봉(冊封)되어 보국승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계(陞階)하여 의정부(議政府) 조찬성(左贊成)에 제수(除授)되다. 1394년 태조(太祖) 갑술(甲戌)에 개성부(開城府)에서 한양(漢陽) 삼청방(三淸坊)으로 이주(移住)하여 국조(國朝)에 보필(輔弼)하다가 1398년 태조(太祖) 무인(戊寅)810일에 별세(別世)하니  태상사(太常寺)에서 집심극장왈제(執心極莊曰)요 강덕극취왈숙(剛德克就曰肅)이라 시호(諡號)를 제숙공(齊肅公)으로 선법(選法)하고 1666년 현종(玄宗) 병오(丙午)에 김시진(金始振)(禮曹參判)의 특소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추봉(追封)되다.조선(朝鮮) 태조(太祖)가 강헌대왕(康獻大王) 고황제(高皇帝)로 추상(追上)됨과 동시에 개국공신(開國功臣)들에게 백세불천지위(百世不遷之位)를 특사(特賜)하니 계림군(鷄林君)의 부조묘위(不祧廟位)로 하사(下賜)하여 인천부(仁川府) 주안면(朱岸面) 구월리(九月里)에 사우(祠宇)를 설치(設置)하고 삭망전(朔望奠)으로 봉향(奉香)하다.임진왜란(壬辰倭亂) 및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병화재화(兵火災禍)로 사우(祠宇)가 전소(全燒)되자 김성진(金聲振)(醉睡堂)이 남원(南原) 아산방(阿山坊)(任實郡三溪面後川里)에 가택(家宅)으로 위패(位牌)만 옮기어 삭망전(朔望奠)으로 분향(焚香)하여오다. 김민도(金敏道) 오위부사용(五衛副司勇)가 봉향(奉香) 당시 김시진(金始振) 예조참판(禮曹參判)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때 녹봉(祿俸)을 공헌(貢獻)하여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의 종인(宗人)들과 찬의(贊議)하고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김영호(김영호)(헌제공)가 제수(祭需) 및 묘사(廟祀)의 자금(資金)을 모금하여 향화(香火)하다. 이후에 사우(祠宇)가 퇴폐되니 김효대(金孝大) 형조판서(刑曹判書)와 김형대(金亨大) 인천부사(仁川府使)와 김효대(金孝大) 밀양부사使(密陽府使)와 김득대(金得大) 담양부사(潭陽府使)등이 녹봉(祿俸)을 공헌(貢獻)하여 계획하고 김언욱(金彦郁)과 김낙규(金樂珪)등이 역사(役事)하여 8개월만에 사우를 중수하고 제전답(祭田畓)을 마련하여 춘추절사(春秋節祀)로 향화(香火)하다.1824년 순조(純祖) 갑신(甲申)에 김사목(金思穆) 좌의정(左議政)이 남원(南原) 아산방(阿山坊)의 종인(宗人)들과 찬의(贊議)하여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김태식(金太植)이 중수지의(重修之意)로 남원사파종중(南原四派宗中)에서 백미 200가마니(?)를 갹출(醵出)하여 제위토(祭位土) 17두락(斗落)을 마련하고 묘대(苗垈)를 중수(重修)하다. 김진현(金鎭賢)이 사재(私財)로 백미(白米) 300가마니(?)과 남원사파종중에서 백미 150가마니를 갹출하여 사우를 중수하고 김진억(金鎭億)이 사문(祀門)을 중수하면서 경향각지의 후손들의 특지가에서 모금하여 1996년 병자(丙子)에 관리사옥(管理舍屋)으로 40()을 신축하고 전국 후손들의 헌성(獻誠)으로 현재의 게림사우(鷄林祠宇)를 중수하여 단청(丹靑)하다.부조묘위제(不祧廟位祭)의 향사(享祀)는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에 하였으니 김교헌(金敎獻)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堤學)이 문헌비고편집위원때인 1903년 광무(光武) 계묘(癸卯)부터 매년 215일과 휘일(諱日)810일로 정획(定劃)하다.

공의 묘소는 경기 광주시 오포면 능평리 산89-1에 있고, 경기도 광주시 지방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사진 출처 : 경기도지방 문화재청

子 맹성無子      子  중성     子  계성

 

 

 

 

 

 

김균 계림군 신도비명(金菌 鷄林君 神道碑銘)

태조께서 복조(福祚)를 열어 천의에 응하고 민의에 순하니 이때에 문호충훈 신하들의 실로명세(세상에서 뛰어나)의 위인이 아니면 그 어찌 능히 용의 비늘과 봉의 날개를 거린(擧鱗)하였겠는가! 저 계림군 김공의 역사에 실린 사업은 비록 적료하나 산하에 맹시한 철권과 기린각에 모신 도상은 가히 무궁토록 빛날 것이다. 어찌 주나라의 십란(주 무왕을 보좌한 열 사람의 시노하, 난의 치의뜻)이라고 해서 모두가 서술한 전기가 있겠는가! 공의 체백지장(體魄之藏)은 광주오포태현 감좌원에 있으니, 예전에 그 곳이 실전되었다가 후손 상국이신 사목이 이 고을 유수로 있을 때에 고로들에게 수소문하여(찾아으나)오직 인사라는 것은 궁한 연후에 통한다고 하더니, 이는 잘못 공의 성대한 훈업이 능히 신인의 도움을 얻었다고 하겠다. 예전에 주제의 묘소가 타인의 소유가 된적이 있으니, 대저회옹(주자)이 손자가 되었음을에도 오히려 이러하였으니, 그 수호하는 정성이 진실로 또한 어렵다고 하겠다. 마침내 흙을 쌓아 봉분을 다졌다. 그뒤에 현각을 세우지 못하고 공의 사손 참봉 정택이 그 아들 인시을 시켜 나에게 신도비문을 청하니 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보록을 살펴 서술한다공의 휘는 균이니 그 선대는 신라 경순왕에서 나왔다. 휘 순웅은 고려에 벼슬하여 장군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대대로 대관이 나왔다. 증조의 휘는 이니 예빈경이오 조의 휘는 기연(起淵)이니 판서요 고의 휘는 지윤(智允)이니 중 찬화공신 참지문하부사이다. 공은 날때부터 특이한 자질을 갖추시어 엄연하고 굳세며 기국(器局)이 깊고 문사(文詞) 가 뛰어나니, 제배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고양왕초에 밀직부사가 되고 신미년 가을에 왕이 수창궁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공이 취흥을 타서 시한수를 읊었더니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안중서로생(安中書魯生) 정복제총(鄭復齊摠)이 모두 시를 지어 위문하였다. 홍무 임신년에 익안대군 방의등 39인과 더불어 성주를 추재하여 이미 수훈을 세우시니 봉호를 내려 주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시에 비록 천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또한 충직하고 지혜스런 사람이 나서서 앞뒤로(주서해 준)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늘과 사람이 같이 응하는 이치가 또한 속일수 없다고 하겠다.

건원릉과 헌릉 신도비의 음사에 모두 공과 배공 극렵(13251392)여러 공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벼슬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재숙공이오 사당은 백세불천지묘로 되었다. 생년은 고증할 수 없고 무인 810일에 돌아가셨다. 공은 전후배(前後配)가 있으니 묘소에 합부하였다. 배 안동권씨는 판서 현의 딸로 1남을 두셔으니 맹성(孟誠)이라 판서 희경공이오, 1녀는 신한에게 출가하였으니 장령이다. 배 무송윤씨는 지평 식녀로 2남을 두었으니 중성(仲誠)은 판봉상사살오(병조)판서에 추증되고, 계성(季誠)은 산원대경으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장방은 무후하여 차방이 공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안민(安民)은 판사재감사요 신민(新民)은 집현부제학이오, 인민(仁民)(한성)판윤이오 사정 신서와 사정 박경지는 두 여서이다. 계방에 종순(從舜)은 한성부윤이오 정랑 권격은 여서이다. 증현손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하니 자손이 번역하고 관작이 빛나니 명공신경이 대대로 끊이지지 않았다. 생각건대 공이 쌓은 음덕의 소치라 하겠다. 그뒤로 가장 뛰어난 분은 대사헌승경, 판결사 춘경, 목사 태경, 판의금, 하경, 전한 전, 좌찬성 당, 참판 시, 직제학 천령, 판서 인손, 대사헌 만균, 절도사 경원,좌의정 경림부원군 명원, 참의 위, 찰방 성지, 판서 남중, 목사 원립, 부제학 경여, 참판 시진, 현감 진수, 감사 몽신, 영돈령 경은, 부원군 주신, 참판 재현, 참의 후연, 참봉 성호, 군수 정운, 판서 성은, 판서 효대, 판서 기대, 감사 여, 좌의정 사복, 참판 영작, 집의 성갑, 판서 정집, 좌상 홍집, 승지 철원, 참판 승집, 판서 창희, 부윤 철희, 참의 춘희, 유림 교헌 공으로부터 여기까지가 18대손이니 과거로써 미래를 점쳐 볼 때 어찌 다 혜아리겠는가! 한문공이 일찍 이르되 누가 그 냇믈을 풍성하다 하였는고! 그 근원은 생각지 않는가하였으니, 나는 공에게 또 이렇게 말하겠다.

명왈 이 광릉의 언덕은 훈덕을 갈무린 바라. 산이 무너지지 않고 물이 마르지 않을 지니, 바라건대 그 이름 길이 빛나리라